점심시간이 되기 전, 후배가 진료하는 병원에 들렀다. 석 달에 한 번씩 들러 타는 약을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말한다. 지난번 진료 때 얘기했던 목의 통증과 기침은 어떠냐고 물어서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목이 아팠었나 하고 생각해보니 꽤 고생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지워진다.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생했던 일도 이제는 잊혀졌다. 자잘한 안부와 농담을 주고받고 일어섰다. 혈액검사를 위해 팔뚝에서 피를 뽑고, 처방전을 받고, 인사를 하고 병원문을 나선다. 아래층 약국에 들러 처방전에 적힌 약을 받기 위해 기다린다. 약국 구석에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남자 약사와 두 번쯤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나 싶어 보니, 마이크를 앞에 두고 모니터를 보며 뭔가를 말하고 있다. 요즘 화제인 영화 이야기며 요가 자세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남자를 신기하게 바라보니 어색했는지 일어나서 조제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었나 보다. 뭐랄까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내릴 것 같은 어두운 하늘 아래로 강변북로를 달렸다. 약국 앞 김밥집에서 산 김밥은 어찌나 맛이 없는지 한 끼를 때워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아마 다 먹지도 않고 버렸을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김밥이라도 먹어야 두 시간 열심히 몸을 굴릴 수 있는데. 문득 며칠 전 죽을 만큼 힘들었던 밤이 떠올랐다. 동이 틀 때까지 밤새도록 구토를 하고 종일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고생을 했는데도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온전히 내가 감당하고 버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일이 끝나고 광화문에 들러 선배의 전시회를 둘러봤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을 남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것.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잘하고 싶어하는 일들.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해가 진 종로통을 걸어 인사동에 들렀다. SNS로 알게 된 지인의 사진 전시회, 사실 오늘의 목적지는 이 전시회였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사진들을 보고, 한참을 서성이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잘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더 이상 한탄하고, 변명하고, 아픈척하지 않기로 다짐한 게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와 ‘그저 그런 날들’. 벌써 수십 년째 입에 달고 있는 말들.

롤랑 바르트의 ‘작은 사건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일기라도 다시(라는 말이 가당치도 않지만) 쓰기로 했다. 불 꺼진 거실 식탁 앞에 앉아서 다짐한다.

기록하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적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기록을 찾으려고 SNS를 온통 뒤져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기록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잊혀진다. 이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무의미해지지 않기 위해서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봄이 오고 있고, 지리산엘 다녀왔다. 봄비를 맞으면서 화엄사를 걸었고, 커피를 마셨다. 벚꽃이 피면 다시 가기로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일상은 여전히 반복된다.

7월이 벌써 열흘도 넘게 지나갔다. 그동안 도대체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논 것도 아니다. 그저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새벽, 달력을 보다가 한심한 내 모습을 깨닫는다.

맨해튼에 고층건물을 수 십채 가지고 있는 부동산 재벌의 아내가 실종됐다. 실종된 부인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당연히 남편인 억만장자를 의심하지만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잊혀질 무렵, 억만장자의 친구였던 여자가 실종사건에 대해 증언을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발표 후 여자는 살해당한다. 경찰은 이번에도 억만장자를 의심하지만 끝내 진범을 잡지 못한다. 그렇지만 결국엔 부동산 재벌의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

2010년, 부동산 재벌 로버트 더스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영화 ‘All Good Things’가 개봉하고 화제가 되자 자신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 촬영이 끝나고 화장실에서 그가 중얼거린 말이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당시 인터뷰 촬영을 위해 무선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던 더스트는 그 사실을 잊고 화장실에서 ‘물론 내가 다 죽여버렸지’라고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는 고스란히 녹음이 됐다. 친구가 죽은 뒤 잠적했다가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를 보고 자기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범행을 자백한 꼴이 됐다.

*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장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촬영비를 전부 장비 구입에 쏟아붓고 때로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장비 구입에 쓰기도 한다. 필요하기 때문에 구입하기도 하지만, 써보고 싶어서 사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한다. 써보고 싶은 걸 일한다는 핑계를 대고 맘껏 써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글쎄, 좋은가? 잘 모르겠네.

무선마이크가 필요한 촬영을 몇 번 했다. 그럴 때마다 렌탈샵에서 빌리기도 했고, 지인에게 빌리기도 했다. 커피값 정도면 충분했다. 카메라에 직접 연결해서 쓰는 마이크가 필요한 촬영을 하기 전엔 마이크를 하나 샀다. 농담처럼 이번 촬영을 하고나서 마이크만 남아도 성공이다, 라고 얘기했다. 물론 마이크는 여전히 잘 쓰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쓰지만. 무선마이크를 살까 망설이다 결국 사기로 했다. 강의 촬영을 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그 때마다 빌릴 수는 없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댔다.

첫 시간, 미리 강사에게 무선마이크를 건넸다. 타이에 마이크를 고정하고 수음이 잘 되는 걸 확인했다. 대기하는 동안 리시버의 전원은 켜둔 채로 카메라 전원을 껐다. 강의실에서 떨어진 강사대기실에서 강사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첫째 시간이 끝나고 휴식시간에도 강사는 여전히 무선마이크를 끼운 상태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나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카메라 전원을 내렸다. 혹시라도 강의가 다시 시작됐을 때 수신이 안 될까봐 수신기의 전원을 끌 수는 없었다.

두 시간 강의가 다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 강사를 따라나섰다. 수고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마이크를 달라고 하자 강사는 깜짝 놀랐다. ‘아, 마이크가 있었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화장실도 가고, 전화도 받고 했는데……’ 표정을 보니 정말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얘기했다. ‘아이고, 강의시간 외에는 아예 전원을 내려놨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딱, 강의시간에만 켰습니다.’

두 번째 강의를 하기 위해 시작 전에 도착한 강사에게 무선마이크를 건넸다. 아마도 강의 경력이 많아서였을까, 강사는 자기가 하겠다며 강의 시작과 동시에 마이크를 끼고, 휴식시간에는 마이크를 빼놨다. 덕분에 나는 카메라 전원을 끄지 않았다.

*

누구나 호기심은 있다.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전화통화 목소리에 빠져들기도 한다. SNS 파도타기를 하면서 타인의 삶을 훔쳐보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들의 다이어리가 궁금해 슬쩍 넘겨보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삶 한복판에 서있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것을 보여주긴 싫어한다. 누군가 내 삶에, 허락없이 들어오는 것만큼 부담스럽고 무서운 일도 없다.

답은 늘 간단하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어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누군가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의 삶에 침입해선 안 된다. 설사 의도치 않게 그 안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 그러고 있는가?

휴식시간, 무선마이크 전원을 끄고 잠깐 내려다본다.

길지 않은 하루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해본다.

여행지에서의 하루, 사람들을 만나 떠든 하루, 급하게 해야 할 일에 매달린 하루…… 그래, 길지 않은 하루도 많았구나. 그렇지만 그 날들도 지나고 나면,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긴 하루’가 되지 않았던가.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늘 시간에 쫓기고, 때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겠다고 달려든 건 아닌지 불안했고, 어떻게든 이번만 잘 마무리하자는 생각을 했다. 상반기에 잡혀있던 출장은 전부 취소됐고, 같이 일하기로 했던 사람들에겐 공수표를 날린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니, 결과적으로 보자면 공수표를 날린 셈이 됐다.

하루 일하고 하루 사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자존감이라는 게 있었다면, 그나마 있던 자존감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런 기분이다. 모든 것이 부끄럽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이 꽤나 먼 길이 되겠구나.

우연히 그를 만난 그 순간, 현실은 그녀의 응집 상태를 기체에서 고체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고, 이로써 다른 대안은 금지되었으며, 무한하게 많은 가능성들이 하나의 ‘지금 여기’로 축소되었다. 아마 그라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마이케의 삶에 제바스타인이 나타난 것은 양자 역학적 파동 함수의 붕괴를 의미했다고.

*양자 역학적 파동 함수 붕괴 : 양자 역학에서 파동 함수는 어떤 계에서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나, 측정을 하는 순간 ‘파동 함수의 붕괴’가 일어나 단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율리 체. 중에서

동쪽 뜰에 눈 녹아 시냇물 흐르는데
봄 그늘 땅에 드리우고 교태로운 구름은 두둥실
중문은 적막하고 후당은 닫힌 채
주렴에는 거미줄과 먼지들
담장 동쪽 오래된 홰나무 아래
실같이 가녀린 푸른 쑥의 새싹 올라오네.

그대 있을 적엔 매년 쑥으로 음식 만들어
집에는 기쁨과 웃음 가득, 시누동서 한자리에 모였지
치마 걷어 올려 허리에 끈으로 졸라매고
손에는 호미를 쥐었네.
모친은 그 모습 지켜보면서 많은지 적은지를 매기시고
그대는 계속 쑥을 뜯고, 딸아이는 광주리 들고 곁에 있었지.

순식간에 국이 다 되고 밥도 뜸이 다 들어
북쪽 시장에서 장을 사고, 서쪽 시장에선 기름을 사오네.
마침 문 앞에 생선장수 있어 한 꿰미 생선을 사니
생선이며 봄 음식이며 상에 낭자하네.
밥상 앞에 나서니 응당 술 한잔 생각나
그대는 패물을 풀어 어린 계집종에게 주며 술 받아 오라 시켰지.
술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 도란도란
골목 어귀 신씨 아낙 집에 새로 술을 걸렀다지.
밥상에 둘러앉아 웃음소리 시끌하고
나는 또한 시 한 수 읊조리니 온갖 시름 다 잊히네.

지난해 나는 관서지역으로 나가
3개월간 그곳 강산 구경하며 천리 멀리서 노닐었지.
돌아와 보니 그대는 병들었고 쑥 또한 다 시들어
그대 울면서 하는 말, “여행이 왜 이리 길어졌는지요?
그때의 물건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
우리네 인생은 그 사이에 하루살이 같은 것
제가 죽고 난 이듬해에도 쑥은 다시 나올지니
그 쑥 보면서 저를 생각해 주시겠죠?”

오늘 우연히 제수 씨가 차려 준 상 위에
부드러운 쑥이 놓여 있기에 문득 목이 메이네.
그때 나를 위해 쑥 캐주던 이
그 얼굴 위로 흙이 도톰히 덮이고 거기서 쑥이 돋아났다네.

 

*

 

봄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내게 봄은 심노숭의 글을 다시 읽으며 시작된다. 몇해째 봄날 날카로운 바람이 불면 이 글을 떠올린다.

출장에서 돌아와 졸린 눈을 비비며 우두커니 앉아있던 오후, 심노숭의 글을 생각한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보다.

일정의 마지막 밤. 이와테현 하나마키 온천호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 자는 일행 때문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오지은의 노래를 듣다 창문 앞에 섰다. 멀리 반달이, 구름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반달이 동그랗게 보였다.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새벽이 빛나고, 달은 졌다. 눈이 쏟아졌다. 바람이 부는 길을 달렸다. 반달을 보고 한숨지었던 밤이,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금요일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날짜가 바뀌었으니 이제 토요일.

오늘은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났다. 저녁식사를 든든히 하고 방에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앞 테이블에 앉았다. 등만 돌리면 침대다. 창밖엔 이자카야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그렇지만 게으른 자에게 금요일의 여유 따윈 없다. 여행가방에 들어있는 싱글몰트를 꺼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는다.

아키타의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