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쓰는 일기

길지 않은 하루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해본다.

여행지에서의 하루, 사람들을 만나 떠든 하루, 급하게 해야 할 일에 매달린 하루…… 그래, 길지 않은 하루도 많았구나. 그렇지만 그 날들도 지나고 나면,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긴 하루’가 되지 않았던가.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늘 시간에 쫓기고, 때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겠다고 달려든 건 아닌지 불안했고, 어떻게든 이번만 잘 마무리하자는 생각을 했다. 상반기에 잡혀있던 출장은 전부 취소됐고, 같이 일하기로 했던 사람들에겐 공수표를 날린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니, 결과적으로 보자면 공수표를 날린 셈이 됐다.

하루 일하고 하루 사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자존감이라는 게 있었다면, 그나마 있던 자존감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런 기분이다. 모든 것이 부끄럽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이 꽤나 먼 길이 되겠구나.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율리 체

우연히 그를 만난 그 순간, 현실은 그녀의 응집 상태를 기체에서 고체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고, 이로써 다른 대안은 금지되었으며, 무한하게 많은 가능성들이 하나의 ‘지금 여기’로 축소되었다. 아마 그라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마이케의 삶에 제바스타인이 나타난 것은 양자 역학적 파동 함수의 붕괴를 의미했다고.

*양자 역학적 파동 함수 붕괴 : 양자 역학에서 파동 함수는 어떤 계에서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나, 측정을 하는 순간 ‘파동 함수의 붕괴’가 일어나 단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율리 체. 중에서

그대 얼굴 위로 쑥은 다시 돋아나고 – 심노숭

동쪽 뜰에 눈 녹아 시냇물 흐르는데
봄 그늘 땅에 드리우고 교태로운 구름은 두둥실
중문은 적막하고 후당은 닫힌 채
주렴에는 거미줄과 먼지들
담장 동쪽 오래된 홰나무 아래
실같이 가녀린 푸른 쑥의 새싹 올라오네.

그대 있을 적엔 매년 쑥으로 음식 만들어
집에는 기쁨과 웃음 가득, 시누동서 한자리에 모였지
치마 걷어 올려 허리에 끈으로 졸라매고
손에는 호미를 쥐었네.
모친은 그 모습 지켜보면서 많은지 적은지를 매기시고
그대는 계속 쑥을 뜯고, 딸아이는 광주리 들고 곁에 있었지.

순식간에 국이 다 되고 밥도 뜸이 다 들어
북쪽 시장에서 장을 사고, 서쪽 시장에선 기름을 사오네.
마침 문 앞에 생선장수 있어 한 꿰미 생선을 사니
생선이며 봄 음식이며 상에 낭자하네.
밥상 앞에 나서니 응당 술 한잔 생각나
그대는 패물을 풀어 어린 계집종에게 주며 술 받아 오라 시켰지.
술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 도란도란
골목 어귀 신씨 아낙 집에 새로 술을 걸렀다지.
밥상에 둘러앉아 웃음소리 시끌하고
나는 또한 시 한 수 읊조리니 온갖 시름 다 잊히네.

지난해 나는 관서지역으로 나가
3개월간 그곳 강산 구경하며 천리 멀리서 노닐었지.
돌아와 보니 그대는 병들었고 쑥 또한 다 시들어
그대 울면서 하는 말, “여행이 왜 이리 길어졌는지요?
그때의 물건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
우리네 인생은 그 사이에 하루살이 같은 것
제가 죽고 난 이듬해에도 쑥은 다시 나올지니
그 쑥 보면서 저를 생각해 주시겠죠?”

오늘 우연히 제수 씨가 차려 준 상 위에
부드러운 쑥이 놓여 있기에 문득 목이 메이네.
그때 나를 위해 쑥 캐주던 이
그 얼굴 위로 흙이 도톰히 덮이고 거기서 쑥이 돋아났다네.

 

*

 

봄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내게 봄은 심노숭의 글을 다시 읽으며 시작된다. 몇해째 봄날 날카로운 바람이 불면 이 글을 떠올린다.

출장에서 돌아와 졸린 눈을 비비며 우두커니 앉아있던 오후, 심노숭의 글을 생각한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보다.

마지막 밤, 어쩌면.

일정의 마지막 밤. 이와테현 하나마키 온천호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 자는 일행 때문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오지은의 노래를 듣다 창문 앞에 섰다. 멀리 반달이, 구름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반달이 동그랗게 보였다.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새벽이 빛나고, 달은 졌다. 눈이 쏟아졌다. 바람이 부는 길을 달렸다. 반달을 보고 한숨지었던 밤이,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금요일밤.

금요일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날짜가 바뀌었으니 이제 토요일.

오늘은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났다. 저녁식사를 든든히 하고 방에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앞 테이블에 앉았다. 등만 돌리면 침대다. 창밖엔 이자카야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그렇지만 게으른 자에게 금요일의 여유 따윈 없다. 여행가방에 들어있는 싱글몰트를 꺼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는다.

아키타의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

설국에서 보내는 편지

비행기가, 조금 흔들렸습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날아오는 동안 뜨거운 핫도그를 하나 먹었고 커피를 한 잔 마셨습니다. 흰 종이컵에 들어있던 커피는 어찌나 맛이 없던지, 그걸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같은 풍경이라고 하겠지요.

삼 주만에 아키타에 다시 왔습니다. 센다이 공항에 내려서 네 시간이 넘도록 버스를 탔습니다. 아키타에는 아직 눈이 남아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가는 길은 겨울이 지나고 있었습니다.이번에도 현의 경계를 넘는 순간,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드문드문 녹은 흔적은 있지만 여전히 사방은 눈으로 덮여있더군요. 버스 창문에 매달리듯 붙어서 길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봅니다.

철탑들, 나도 모르게 사진기를 꺼내들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버스는 미야기현을 지나고, 이와테현을 지나 아키타현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철탑들은 눈밭에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왜인지 그 풍경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번 아키타에서 봤던, 눈 쌓인 벌판에 서있던 철탑을.

해가 질 무렵, 숙소에 들어섰습니다. 지긋한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민박집, 난로가 있는 거실에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집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정성이 가득한 밥상과 마주했습니다. 아키타의 첫날밤은 고요히 흘렀습니다.

문득,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당신을 생각했다는 게 솔직한 말이겠지요. 기리탄포나베를 덜어내며, 이부리가코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했다면 거짓말일까요. 북국의 밤, 어쩌자고 나는 흰쌀밥을 씹으면서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까요. 그리고 그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다시 날이 밝고, 긴 하루가 지났습니다. 하루종일 낯선 거리를 걸으면서, 콩을 으깨 미소를 만들면서, 술도가에서 누룩을 씹으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식사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그저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키타에서 지낸 하루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보낸 시간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 갑작스레 날아든 편지를, 아직 겨울을 앓고 있는 설국의 날들을, 눈 쌓인 벌판에 홀로 서있는 철탑을 부디 읽어주길.

안녕? 안녕! 안녕.

동어반복의 날들

동어반복의 날들이다.

‘엔딩노트’를 보며 펑펑 울다 잠이 들었다. 마지막 그 며칠간 병실 풍경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린 손녀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과, 자식들을 내보내고 부부가 울먹이며 사랑한다고, 같이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던 장면을 보며 소리내어 울었다.

일요일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날이 밝았고, 눈을 뜨자마자 늘 하던대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먼 나라에서 살고 있는 선배의 부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엔딩노트’에서 그런 말이 나왔었지. 자다가 깨어나지 않는,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선배가 고통스럽지 않게 돌아갔는지는 모른다.

대학시절, 한 학번 선배와 사귀면서 갈곳이 없었던 우리는 그의 동기들이 자취하는 방을 드나들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그는 하숙을 했기에 우리가 맘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그의 동기들이 자취하는 방밖에 없었다. 주인이 없는 방을 차지하고 놀다보면 주인들이 돌아와 손님처럼 구석에 앉아있곤 했다. 두 사람 중 한 선배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이었는지 떠난 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신촌의 어느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간간히 소식을 전해들었다. 몇 년전엔 잠깐 귀국한 선배와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갔었다. 그 자리에서도 잠깐 대학시절 내 철없던 연애이야기가 돌았던가.

출장으로 시애틀에 들렀을 때, 밴쿠버에서 일정을 마치고 시애틀 스타벅스에서 마지막 촬영을 할 때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선배였다. 여유가 되면 얼굴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그게 어려우니 이렇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는 말에 반갑게 인사를 하고 또 오게 되면 얼굴 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한 번인가 더 시애틀에 들렀지만 전화도, 연락도 못하고 돌아왔다. 선배가 한국에 들어오면 다른 선배들과 만나서 또 옛날 연애이야기를 하면서 웃으리라 생각했다.

그 선배의 부음을 보고 처음엔 부친상이겠거니 싶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본인상이라고 적혀있었다. 본인상, 이라는 문자를 몇 번인가 받았다. 그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 겨우 일어나곤 했다. 몇 번을 마주쳐도 결코 익숙해지지 못할 문자들, 순간들.

오후엔 원주에 다녀왔다. 돌아간 선배와의 시간을 나보다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을 선배를 만났다. 아침의 문자가 아니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고, 일이 끝나고 기분 좋게 술이라도 한잔 할 수 있었을텐데 선배도 나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려 돌아오는 길, 먼 나라를 생각했다. 시애틀 스타벅스 앞, 생선을 가득 실은 차에서 퍼블릭마켓으로 짐을 나르던 사람을 바라보던 순간,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순간을. 철없던 시절 내 연애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을 얘기하며 웃던 선배를, 내 스무살의 날 둥지처럼 찾던 선배의 자취방을.

동어반복의 날들이다. 그리고 나는 불이 꺼진 고속도로를 언제까지고 달린다.

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 – 곽재구

언젠가 우리는 노래를 부를 것이고 언젠가 우리는 시를 쓸 것이고 언젠가 우리는 절망할 것이며 언젠가 우리는 김밥을 싸들고 가까운 시골로 소풍을 갈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함께 사랑할 것이며 언젠가 당신은 당신을 사랑한 누군가를 미워할 것이며 그러다 언젠가 세상을 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