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들

코엑스에서 열린 사진기자재전에 다녀왔다. 매년 둘러보는 행사다. 새로운 연장들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뜻밖의 것들을 보는 놀라움도 있다. 나름대로 업계종사자인지라 부대장비나 기술을 눈여겨 본다. 요즘은 새로운 장비보다는 사진을 출력하는데 관심이 많다. 프린터와 액자 관련 부스를 유심히 둘러봤다. 사야할(?) 프린터는 정해져 있지만 선뜻 결제를 하진 못한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과연 내가 이걸 사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이다. 늘 들고다닐 작은 카메라 하나 사는 것도 몇 달을 고민하고 겨우 정했으니, 할말 다했지.

원목(이라지만 아주 고급스럽진 않은) 액자가 눈에 많이 보였다. 제일 깔끔한 제품이 있어서 가격을 문의했더니 업체에서 나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따로 작성된 단가표를 건네주는데, 공장이 본가 근처였다. 반갑게 얘기를 나누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돌아섰다. 조만간 액자 주문을 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장비부스가 있는 홀을 지나 옆홀에 들어섰더니 여행사진전을 열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풍경들, 이국적인 모습, 낯선 얼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시간쯤 느리게 걸으며 사진들을 둘러봤다. 눈이 아팠다. 온통 채도가 강한 사진들이었다. 거기에 HDR까지. 글쎄, 요즘 추세가 그런 건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취향엔 별로더라. 세 장쯤 맘에 드는 사진이 있었고, 그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사진이나 영상, 책, 영화를 볼 때마다 느낀다. 나에겐 ‘뚜렷한’ 취향이 있다는 걸. 누군가는 내 취향을 ‘심심하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 재미없는 사진은 왜 찍느냐’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게 내 취향인걸.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시간이 멈추는 풍경이 있고, 눈물이 날만큼 좋은 일상의 조각이 있는 걸.

아무 것도 사지 않겠다는 다짐은 물거품이 되어 ‘필요한’ 물건들을 몇 개 사서 들고 전시장을 나왔다. 그렇지만 집으로 가는 전철 안, 머릿속엔 온통 프린터 생각뿐이다.

사진을 뽑아서 팔면, 프린터 값을 뽑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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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Beijing

노동절을 앞둔 북경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스차하이 거리에서 인력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 일정은. 꽉 막힌 도로를 뚫고 겨우 스차하이에 도착했지만 인력거는 탈 수 없었다. 워낙 인파가 많아서 당국에서 인력거 운행을 금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벌금을 내고라도 타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겨우 인력거꾼을 수배하고 십 분도 넘게 걸어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큰길에 나가지 않는 조건으로 인력거를 타기로 했다. 나와 현지 여행사 부장을 태운 인력거는 골목을 벗어나기도 전에 체인이 끊어졌다. 결국 인력거를 바꿔타고 200미터쯤 달렸다. 그리고 끝.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는 길이었다. 어느 순간 옆으로 가로지르는 골목이 빛나고 있었다. 나무들 틈으로 반짝거리는 해를 보고 카메라를 들고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 사진정리를 하다 이 사진을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했다. 북경의 어느 골목, 반짝이던 순간을.

그런데!
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아저씨 옆에 있는 흰 강아지, 큰일을 보는 순간이었네. 심지어 원본 사진을 확대해봤더니 똥 한 덩어리가 똑 떨어지는 찰라에 내가 셔터를 눌렀더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왠지 미안해졌다.

미안, 멍멍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다.
그래도 공중에 떠 있는(!) 변을 보니 장은 튼튼하구나, 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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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밤

Beijing Capital International Airport

“예전에 제 꿈이 말이죠…”

이박사일, 긴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벽 두시반에 북경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흔다섯살이 되면, 세계를 떠돌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었죠. 지금 보면 그게 이뤄진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참…”

장비가방이 실린 카트를 밀고 있는 내 곁에서 속도를 맞춰 걷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뤄진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네요.”

새벽 두 시, 두고온 곳에 사는 이들보다 한 시간 늙어버린 나는 고개를 꺾고 졸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2시 30분, 북경발 인천행. 15번 게이트.

문득 돌아보니 14번 게이트에서는 모스크바행 비행기가 같은 시각에 떠나는구나.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는 공항의 밤, 어두운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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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혹은 다른 그 어떤 것.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실내는 어둡다. 국경을 넘었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사타구니의 가려움증은 여전하고, 카메라 렌즈에 붙은 먼지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다.

긴 하루를 보냈다. 몇번인가 보안검색대를 지났고 맥주를 마셨다.

한 시간의 시차. 나는 여덟시오십분을 살지만 당신은, 볼 것 없는 아홉시 뉴스가 끝난 세상에 있다. 우리, 이렇게 여행을 떠났다면 한 시간 젊어진 몸으로 서로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아니 있었을까.

나는, ‘있을까’와 ‘있었을까’의 사이에서 여전히 주춤거린다. 버스는 달린다. 올림픽이 치뤄진 도시를 뒤로 하고 어쩌면 내가 몇년 전에 묵었을지도 모를 호텔로.

42도. 여기서 마시고 호텔에 가면 다 깨요, 라는 여행사 사장님의 꾀임에 넘어가 마신 술이,

깨고 있다. 불이 꺼진 도로를 달리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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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미세먼지가 심할 거라는 예보를 듣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렇지만 하늘은, 오랜만에 한없이 푸르렀다. 그 파란 바다 위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등에는 커다란 장비가방을 메고 하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일요일의 시작이었다.

젊은 신랑과 신부는 밝게 빛났다. 예식은 여유롭게 진행됐고, 기분좋게 술에 취한 하객들 사이에서 신랑과 신부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느덧 머리 위에 있던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네 시가 넘었다. 그제서야 일이 끝났고, 다시 무거운 장비가방을 메고 마스크를 챙겼다. 돌아오는 길은 전철을 타기로 했다. 미세먼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보려면 아무래도 버스보다는 전철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이야기. 결혼 10년차, 자기를 닮은 아이가 있는 여자, 특별히 모난 게 없는 남편, 그렇지만 더이상 두근거리지 않는 일상. 여자에게 불현듯 찾아온 설레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고 점점 ‘그’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는 여자.

세상에 통속적이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남자와 여자가 태어난다. 두 사람이 만난다.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다. 그리고 죽는다. 인생은 계속 반복된다. 그 어떤 이야기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던가.

일요일 오후의 한산한 전철에서, 흔들리는 만원버스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에서도 책을 펼쳐들었다. 서늘한 빈집에 들어서자마자 개수대 앞에 서서 정성스레 손을 씻는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겨우 첫 끼니를 때운다. 어제 먹으려고 냉동실에서 꺼내뒀던 베이글을 반으로 갈라 오븐에 넣는다. 빵이 익는 냄새를 맡으며 얼음을 채운 잔에 더치커피를 담는다. 빈 접시에 베이글을 담아 한 손에, 다른 손엔 커피를 들고 소파에 무너지듯 쓰러진다. 창으로 기우는 오후의 볕에 기대 다시, 책을, 펼친다.

계절이 흐르고, 이야기는 끝난다. 한숨을 쉰다.

세상에 통속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까,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인생은 반복된다. 인생은 반복된다.

얼음이 녹은 커피잔을 들고 생각한다. 가만, 내가 ‘사랑’이라고 소리내어 본 게 도대체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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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다

Rainy day

죽은듯이, 라는 진부한 표현처럼 며칠을 보내고 있다.

아무 일이 없는 날이면 그저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고, 찍고 싶은 사진을 둘러본다. 그러다 소파에 기대 잠이 든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주섬주섬 먹을 걸 만들고, 그걸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 사치라면 사치고, 낭비라면 낭비다.

엊그제는 초등학교 동창 부친상에 다녀왔다. 코찔찔이 친구들이 전부 아저씨가 되어 앉아있었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친구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댔다. 상주인 친구도 반갑다며 내 옆에 앉아 술을 마시다말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동생들을 불러 잠깐 누울 곳을 찾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거리, 차들이 없는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무얼 하다 잠이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조금은 슬프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상갓집에 다녀오면 늘 그랬으니까. 슬퍼하다 설핏 잠이 들고, 밤새 뒤척이다 이른 새벽에 깨곤 했으니까.

어제는, 그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루종일 집에서 책을 읽다, 영화를 보다, 잠을 자다, 밥을 먹다, 술을 마셨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기록하지 않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푸념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럼 기록하는 삶은 뭐가 다른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빗방울이 흐르는 창을 찍은 것이다. 오늘 한 일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일이다.

기록하지 않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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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아침 일찍 집을 출발했다. 출근길 정체를 피해 외곽순환도로를 거꾸로 달렸다. 9시쯤이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개가 끼었고, 비가 조금 내렸다. 서울 가까이에 있는 리조트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해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누나가 뜻밖의 뉴스를 전해줬다.

“큰 배가 침몰했다던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깜짝 놀랐다. 얼마나 큰 배가 침몰했길래 뉴스에 나왔을까 싶어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배,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태운 배가 진도 어디쯤에서 좌초했다고, 그렇지만 탑승객은 전원 구조했다는 뉴스. 어쩌다 저런 일이 생겼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라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된 행사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중간중간 새롭게 단장한 리조트 객실을 찍었다. 해가 지고 와인을 곁들인 저녁이 나왔다. 운전 때문에 와인을 마시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리조트 로비에서 통기타 가수가 공연을 했고, 달이 떠서야 일정이 끝났다.

피곤한 몸으로 운전을 하면서도 커다란 배, 수백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던 배,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중이었다는 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전원 구조라고 했으니까.

그날 이후의 일은,

며칠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눈을 뜨면 주방에 서서 손바닥만한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한숨을 쉬다 눈물을 흘렸다. 그 커다란 배가 서서히 뒤집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두려움에 떨며,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서서히 물에 잠기는 걸, 그 어떤 영화보다 무서운 장면을, 두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뉴스를 보며 울었고, 신문을 보며 울었다.

이 년이 지났다.

며칠 전, 거래처 미팅을 하며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고,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다고 말을 했더니, 몇 년 전에 그 리조트에서 내가 촬영을 하는 동안 옆에 있었다는 말을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예, 그게 이 년 전, 4월 16일이었죠.”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상대도 혼잣말처럼 “아, 그날이 그 날이었군요.”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두 해가 지났다. 그 날, 마음으로 기도하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으로 바꿨다. 더러운 차 유리를 대충 닦고 붙인 노란리본 사진을 찾아보니 작년 그 날이었다.

2015년 4월 16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러운 유리창을 닦았다, 라고 적혀 있었다.

2016년 4월 16일,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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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5II

OM-D E-M5 II

몇달을 고민하다 어제 오후에 구매를 결정했다. 내가 원했던 기능은…

인터벌촬영, 쓸만한 동영상, 방진방적, 작고 가벼운 바디 였다.

후지, 올림푸스, 소니를 저울질 했으나 결국 저 녀석으로 결정했다. 몇달 전에 구한 25mm f1.4 렌즈가 너무 맘에 들어 그 렌즈를 쓰기 위해서라도 올림푸스에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업무에 쓰는 메인 바디를 업그레이드 하는 게 우선이지만 맘처럼 쉽지가 않다. 벌써 일 년도 넘게 망설이고 있다. 그냥 구매하면 될 일인데 자꾸 미루게 된다. 오히려 그냥 가볍게 들고 다닐 바디를 찾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동안 쓰고 있던 바디는, 저 사진을 찍은 GX1이다. 2012년 1월에 샀으니 만 4년을 들고 다닌 셈이다. 디자인도 맘에 들고 딱히 나무랄데 없는 녀석이지만 이제 배터리 성능이 다해서 몇 컷 찍지 못한다. 정품 배터리 가격이 무려 8만원대! 거기에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카메라를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몇 달째 고민하다 새 기계를 들였다.

방진방적 기능, 딱히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일년에 한두번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올림푸스 방진방적이야 예전부터 익히 겪어본지라 믿음이 간다. 실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베니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심지어 캬리비안 베이에서는 풀 안에 들고 들어가서 맘놓고 촬영도 했다.

동영상 기능은 좀 아쉽다. 파나소닉이나 소니가 워낙에 출중하지만 올림푸스는 막강한 성능의 손떨림방지기능이 있으니 그정도로 타협한 셈이다. 해외출장 갔을 때 비가 내린다면 급하게 활용할 정도는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당장 다음주 월요일에 영상촬영을 할 일이 있으니 한번 찍어보면 어떨지 알 수 있겠지.

같이 구입한 렌즈가 좀 큰 편이라서(그래봐야 DSLR 렌즈에 비하면 작지만) 아무래도 세로그립을 붙여야 할 것 같다. 이것저것 달면 다시 크고 무거워질텐데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새 연장을 구했으니, 새해 결심했던 개인작업을 시작해야겠다. 뭐, 언제는 연장이 없어서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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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일기

원주에 다녀왔다. 선배가 일하는 회사에서 사진촬영을 해달라고 해서 장비를 잔뜩 챙겨 아침에 출발했다. 고속도로가 달라진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강원도 가는 길이 더 빠르고 편해진 거야 벌써 오래전 일이니까.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달렸다. 여주를 지나고 문막을 지나 흥업으로 가는 길은 낯설었다. 이십여년 전, 원주가 제 이의 고향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동네에 터전을 마련하리라 생각했고, 그러고 싶었다.

촬영을 마치고 다니던 학교에 들렀다. 학교도 많이 달라졌다. 못보던 건물들이 늘었다. 그렇지만 노천극장 아래 호수를 끼고 도는 길은 여전했다. 폭이 넓어지고 중간에 정자가 생긴 것만 빼면 예전 그대로였다. 봄이면 수업을 빼먹고 좁은 호숫길, 우리가 키스로드라도 불렀던 그 길을 걸어 잔디밭집이라는 식당에서 닭도리탕에 소주를 마셨다. 낮부터 마신 술은 저녁이 되도록 늘어났고 마시는 사람도 늘었다. 내게 봄은 그렇게 기억된다. 아직 쌀쌀한 날씨, 잔디밭에서 시작된 술자리, 해가 지도록 이어지는 말들, 조심스레 잡은 손.

한 시간쯤 캠퍼스를 돌고 돌아오는 길은 조금 서글펐다. 그 시간들이 떠올랐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봄밤에 손잡고 술 마실 사람 하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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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광화문에서 시작된 저녁은 시청 근처를 맴돌고 끝났다. 스파게티와 피자, 비싸기만한 생맥주와 먹지도 않을 안주를 앞에두고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회사 이야기와 공통으로 아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겪은 고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다녀본 외국의 이야기를 했고, 가보지 못한 나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에 취해 테이블에 쓰러진 커플을 보며 맥주집을 나섰다.

봄밤은 싸늘했다.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두 번 횡단보도를 건넜고, 지하도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광역버스 안에서 잠이 쏟아졌다.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할 곳에 내려서 십 분쯤 덜덜 떨었다. 타야할 차가 왔고, 버스에서 내리던 술에 취한 남자는 길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손님을 다 태운 차는 무심하게 출발했다.

내릴 정거장을 두 곳 남겨두고 버스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일어난 기사는 제일 뒷자리에 널부러져 있는 남자를 한참동안 흔들어 깨웠다. 술에 취한 승객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몇분쯤 큰소리로 손님을 깨우던 기사는 결국 포기하고 버스를 출발했다. 꽤 소란스런 여정을 마치고 집 앞 정류장에 내렸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 가로등 아래 벚나무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오늘도 긴 하루였지만 봄날이었구나. 저렇게 벚꽃이 빛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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