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대학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3인1실 방에 나와 같은 과 동기가 한 명, 다른 과 신입생이 한 명이었다. 어느 주말로 기억난다. 셋이 기숙사 앞 잔디밭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 다른 과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달도 밝고 기분도 좋으니까 니가 시 한 수 읊어봐라’라고.
나는 정색을 하고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시를 읊냐고 대꾸했다. 시가 이런 술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시절엔. 그 친구는 ‘야, 옛날 선비들이 달밤에 술 마시면서 시조 읊고 그런 게 이런 거지. 원래 이렇게 앉아서 시도 읊고 그래야지. 니가 안 하면 내가 하지뭐.’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결국 시를 읊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자람밴드의 ‘빈집’을 듣자마자 그 순간이 떠올랐다. 대학신입생시절의 어느 주말 밤, 기숙사 잔디밭에 앉아서 얼굴을 붉혔던 그 순간이.
 
이틀동안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일행들을 내려주고 어둡고 습한 강변북로를 달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운전하는 차는 사람이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창문을 열었다. 에어컨을 끈 실내는 습하고 끈적거렸다. 에피톤프로젝트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 울컥 짜증이 났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노래들은 듣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를 질었다.
 
여름이면 에피톤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었다. 새벽까지 깨어있다 무작정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땀범벅이 되어서 돌아와 욕조에 누워 에피톤프로젝트의 노래를 무한반복하면서 들었다. 어쩌다 제주에 갈 때도 늘 같은 노래를 들었다. 나중엔 내가 왜 이 노래를 듣기 시작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에피톤프로젝트의 노래를, 그래도 끝까지 듣고 ‘빈집’을 들었다. 듣고,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따라불렀다. 어두운 하늘, 습한 공기, 붉은 등을 밝히고 꼬리를 물고 서 있는 차들, 가끔씩 떨어지는 빗방울, 여전히 울리지 않는 전화기.
 
비포장도로를 십 분이 넘도록 올라간 곳에 있는 펜션의 밤은 서늘했다. 권하는 술을 마다하고 자리에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깼다. 열두시 반. 옆에 잠든 사람이 뒤척거리는 바람에 깼다. 세시. 일행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깼다. 네시 반. 그렇게 여러번 잠에서 깰 때마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번쩍거리며 시간만 밝히고 어두워졌다.
 
이슬비를 맞으며 숲을 헤매고 다녔고, 졸음을 참고 운전을 했다. 긴 하루였다. 그리고 ‘빈집’을 중얼거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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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그렇지만 울고 싶은 날들

예전에 힘든 시기를 보내던 후배에게 해준 충고가 있다.

‘좋은 일이 계속되면 그건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 거야. 작은 좋은 일이 큰 좋은 일을 불러오고, 그것들이 모여서 더 크고 좋은 일이 되는 거겠지. 그렇지만 나쁜 일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어. 어제 겪은 나쁜 일은 그 일로 끝이고 만약 오늘 더 나쁜 일을 겪었다면 그건 그대로 하나의 나쁜 일일 뿐이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을 하지. 좋은 일이 계속되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나쁜 일이 계속되면 아, 나는 왜 이럴까 어쩌자고 계속 이런 일만 벌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힘들어 하지.’라고.

글쎄, 적어도 나는 저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보름 사이에 차사고가 두 번이 벌어졌다. 한 번은 상대방 과실, 한 번은 내 과실이었다. 내 차가 공업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 빌린 아버지 차도 공업사에 들어갔다. 어제 내 차를 찾아왔고, 아버지 차는 다음주나 되어야 찾을 수 있다. 통장 잔고 때문에 고생을 했고, 출장은 취소 됐다. 몸은 좋지 않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린다.

좋지 않은 일은, 그저 각각 상관 없는 일로 봐야지, 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그냥 길바닥 위에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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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절반, 혹은 끝나버린.

주말 내내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보냈다. 새로운 한 주일이 시작되고, 비가 내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길을 달리면서도 내내 이 노래를 들었다. 올 장마에는 Uriah Heep의 Rain이 아닌 이 노래로 버틸 수 있으리라.

6월이 지나갔다. 한 달이 지나갔고, 반 년이 지났다. 6월의 마지막 날이자 전반기 마지막 날엔 미친듯이 술을 마셨다. 기억을 잃고 작업실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깼다.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전날엔 하루종일 땡볕에서 촬영을 했다. 모델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바위 위에서, 나무 아래서, 해가 지는 정자에서 순간을 담았다. 오전 8시부터 시작한 하루가 밤 9시 되어서 끝났다. 일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 내가 운전한 차의 조수석 앞부터 뒷범퍼까지 전부 긁히고 상했다. 차를 바꾸고 처음 겪는 사고였다.

새 달이 시작됐다. 달라진 건 없다. 늘 그랬듯이. 폭우가 쏟아졌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강은 넘실거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눈을 뜨자마자 전화기부터 확인했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있었고,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재난알림 문자가 왔다. 카드결제일을 알리는 문자가 쏟아졌고, 입금되지 않는 통장에서 깡통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환청을 들었다.

친구와 통화를 하며 말했다. ‘살아남자, 우리’라고.

살아남자, 우리.

표어처럼 소리내어 읽어본다. 어떻게 사느냐,는 역시 사치였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내겐. 살아남아야 어떻게 살지 고민을 할 수 있겠지.

며칠째 떠나지 않는 우울감이 어디에서 온 건지, 오늘은 가만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깡통소리를 내는 통장 때문인지, 울리지 않는 전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장마와 함께 들이닥친 습기 때문인지. 그러니 우리,

살아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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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수 큰아들입니다, 저는.

몇년 전, 공항에 자주 갈 일이 있을 때면 늘 마이 앤트 메리의 ‘공항 가는 길’을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꾸역꾸역 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무슨 의식처럼 그 노래를 들었다. 문득 ‘장례식장 가는 길’이라는 노래는 어디 없나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들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젠 엄마가 보낸 ‘괜찮을 때 전화 좀 해라’라는 문자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난 토요일, 화성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잠깐 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어디니? 응, 일하고 있다고. 그래, 근데 어쩌니…… 또 초상이 났다. 그래, 오늘은 안 된다고? 그럼 내일 가야겠구나. 그래, 어쩌겠니. 니가 와야지.’

일요일 오후, 집근처에 사시는 친척분을 같이 모시고 한 시간쯤 운전을 해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조문을 하고, 길에서 마주쳤다면 얼굴도 못 알아봤을 먼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아버지와 인사를 나눈 후엔 나를 돌아보며 한 마디씩 한다. ‘아, 얘가 그 의사선생님?’ ‘아, 이 아들이 그 분당에 있다는 의사?’ ‘얘가 이번에 박사됐다는 그 아들인가?’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 그건 막내고. 얘는 큰아들.’이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 뒤에서 나는 어정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육개장 국물을 마시며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내내 속이 편치 않았다. 앞에 앉은 먼친척이 드디어, 내게 물었다. ‘그럼 이 조카는 무슨 일을 하나?’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얘는 사진을 해요.’

‘사진을 해요’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난 다시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예, 뭐……’

옆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친척이 다시 물었다. ‘오, 사진? 그럼 무슨 사진을 찍어요?’ 이번에도 아버지가 기다렸다는듯이 대꾸하셨다. ‘그런데, 예술사진이 아니고 그냥 상업사진을 해. 돈 되는 사진 찍는 거지 뭐.’

아이고 아버지. 상업사진이라니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오, 상업사진이면 무슨 스튜디오 같은 거?’ ‘아이고 아닙니다. 그냥 되는대로 이것저것 찍어요. 무슨 스튜디오가 있거나 그런 것도 아니구요. 그냥 뭐……’ 말꼬리를 흐리다 아버지쪽으로 돌아서 짐짓 웃으며 말을 했다. ‘아버지, 그럼 저 이제부터 예술사진 해도 돼요? 그럴까요?’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표정을 짓는 아버지 앞에 앉아계시던 엄마가 눈을 흘기며 말씀하셨다.

‘무슨 소리야. 돈 되는 일을 해야지. 돈 더 벌어야해.’

예, 그럼요. 돈 벌어야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집안 모임에 갈 때는 등 뒤에 ‘의사아들 아님. 반백수 큰아들임.’이라고 써붙이고 가야겠다고.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녀석은, ‘그러지말고 등뒤에 여권사진, 증명사진 찍습니다 라고 써붙여’라고 하더라. 그러게, 정말 그럴까봐.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이 든다.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이 어지럽다. 사진을 ‘한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되는지, 돈을 제대로 벌고 있는지, 아니 제대로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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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날들

출장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친구와 술을 마셨다. 제법 마셨을 때 생각이 났다. 동창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봐야한다는 사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버스에 올랐다. 몇 통의 전화를 받았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상주인 친구와 인사를 나눴고, 어색하게 앉아서 다시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고개를 꺾고 잠이 들었다. 그 정신에도 거실에 술판을 벌였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따르고, 쥐포를 굽고, 소세지를 데쳤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 누웠다.

며칠째 온통 한 가지 생각이다. 술에 취해서, 작업을 하면서, 잠들기 전까지, 눈을 뜨자마자.

일본 출장 작업을 마무리하면 하루나 이틀쯤 바람을 쐬러 다녀와야겠다. 라고 적고보니 다음주말엔 일본에 가는구나. 그래도 이번엔 작은 카메라 하나만 들고 가도 되니 다행이다.

여름이 시작됐다. 피곤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도 잠이 오질 않는다. 창문을 열고 멀리에서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를 듣는다. 꿈 없는 잠, 고요한 밤. 요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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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반짝거리며, 떨리던 밤이 지났다.

서울을 두 번 가로질렀다.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내 플레이리스트엔 낯선 노래들이 채워졌다. 같은 노래들을 몇 번쯤 들었을까. 먼 곳으로 가는 버스를 보고 돌아섰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누웠다. 빈집, 늘 그랬던 곳.

낯선 노래들 뒤에 몇 곡의 노래를 덧붙인다. 몇년 만에 에피톤프로젝트를 다시 듣는다. 어두운 거실, 지친 몸 위로 노래가 흐른다. 싱크대엔 맥주가 반쯤 남은 컵과 올해 첫 아이스라떼가 녹아 있는 잔, 눅눅해진 감자칩이 배경처럼 녹아든다. 낯선 감정이, 낯선 시간처럼 찾아온다. 긴 하루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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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집 식탁 위에 두고온, 읽다만 책의 결말이 궁금해진 새벽이다. 다다미방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작은 잔이 연신 비워졌고 다시 채워졌다. 아홉시쯤 식사자리가 파하고 혼자 숙소를 나섰다.

작은 온천마을은 한밤중이었다. 불이 꺼진 골목을 걷고 들어왔다. 방 한쪽에 깔린 이부자리 위에 엎드려 사진들을 보다 잠이 들었다. 창 아래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자정을 십 분 남겨두고 있었다.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온천으로 올라갔다. 불이 꺼진 아담한 욕탕에 들어섰다. 창밖은 검은 어둠이 가득했다. 아무도 없는 욕탕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다시 방에 들어선다. 물소리는 여전하다. 숙소 앞으로 흐르는 개울소리다. 집에 두고온, 이제 막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의 결말이 문득 궁금해졌다. 짐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낸다. 아이폰으로 오지은의 노래를 작게 튼다. 밤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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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헤나

다시, 날짜가 바뀌고 나서 쓰는 어제의 일기.

예약해뒀던 샵에 가서 헤나를 했다. 늘 연장을 드는 오른쪽 손등에서부터 손목 위까지, 왼쪽 손엔 서비스(!)로 포인트를 줬다. 한 시간쯤 가만히 앉아서 헤나를 그리는 아티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실은 이거 그리고 가서 작업을 좀 해야 해서…’

‘아, 괜찮아요. 한두시간 후면 물로 씻어내시면 돼요.’

‘그런데,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라 저녁에 식구들이 전부 모여서…’

‘헉, 어떡해요? 그 때쯤이면 막 발색이 될 텐데!’

‘아, 괜찮아요. 지난번엔 헤나 하고 장례식장에도 다녀왔는걸요 뭐.’

‘……’

지난번엔 헤나를 한 다음날이던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갓집에 다녀왔다. 최대한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상주와 맞절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앉은 자리에서 아버지가 놀라서 물으셨다.

‘니 손은 왜 그러냐?’

‘아, 예… 이거 지워지는 거에요. 아는 분이 그려주셨어요… 근데 아버지 식사 하셔야죠…’ 어쩌구저쩌구.

오늘도 본가에 가자마자 엄마가 소리를 지르셨다.

‘야! 손이 왜 그래?’

‘아, 이거 지워지는 거에요. 걱정마세요.’

‘맞다, 엄마가 미리 전화할 걸. 어떡하냐 이따 아버지 모시고 초상집에 다녀와야하는데.’

지난달에 초상집에 다섯번 넘게 다니면서 숫자 세는 걸 포기했다. 엄마와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이제 막 푸른 색이 예쁘게 올라오고 있었다. ‘아, 오늘도 최대한 공손하게 두 손을 잘 모으고 있어야겠구나.’

*

올해 들어 상갓집에 다녀온 게 열 번이 훌쩍 넘었다.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동네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 또 누가 돌아가셨더라. 친척분들이 돌아가셨고,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가까운 이웃 아저씨의 의절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또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돌아가셨다. 시끌벅적한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고, 승화원에서 고인의 유골을 기다리기도 했다. 엄마를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옛날 이야기를 들었고, 별로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다.

동네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세셨다. ‘이제 우리 동네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하며 손을 꼽는 아버지의 거친 손가락이 몇 개나 접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할아버지의 기일, 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때 이북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엄마는 얼굴도 못 본 시아버지의 제사를 챙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일 년에 두 번 제삿날을 챙겼다. 몇 년 전까지는 이런저런 음식들을 준비하고 제삿상을 차렸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땐, 사촌들까지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 몇 년 전부턴 기일에 식구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같이 한다. 음식준비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온 식구가 모여서 돌아가신 분 기억하면서 기도를 하고 식사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젠 조카들의 어리광을 보는 재미에 아버지의 굳은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 그게 잘 차려진 제삿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는 그동안 이미 차고 넘치도록 치뤄냈다.

*

주말엔 제주에서 촬영이 잡혀있다. 오랜만에 제주에 내려갔으니 며칠 묵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항공권은 예매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작스레 일본 출장이 잡혔다. 부랴부랴 일요일 밤에 올라오는 비행기편을 겨우 예매했다. 일요일 밤에 올라와서 월요일 새벽에 출국, 화요일 밤에 귀국하는 스케줄. 생각만으로도 피곤이 밀려오는 일정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 하고 일을 받았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연락이 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몸이 힘든 건 다른 문제고.

*

그러니, 오늘은 얼른 자자. 그리고 내일은 제주행!

그나저나 피부관리 좀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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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부끄러운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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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시작됐다, 라고 적는 6월의 둘쨋날 새벽이다.

날짜가 바뀌고, 달이 바뀌는 게 뭐 대단한 일이겠냐만 유독 이번 달이 시작되는 날은 남달랐다. 여기저기서 달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안달을 해댔고, 더워진 날씨 때문에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오후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촬영을 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액자공장에 들러 주문한 액자를 가져왔다. 5×7 사이즈 액자 50개! 사람좋아 보이는 공장 사장님이 따라나와 비타민 음료를 하나 건네주셨다. 홀짝홀짝 마시며 돌아오는 길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라면 거짓말이고 부담이 좀 됐다. 프린터를 장만하고 이주일이 넘도록 포장을 풀지 않았던 것과 같은 부담감이다. 제대로 된 프린터를 들인다는 건, 예전으로 보자면 암실을 하나 꾸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거기에 빈 액자가 한 상자.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진을 찍는데요…’라고 하는 처지에 프린터에 액자라니…

저녁엔 시청 공보과에 있는 분과 저녁식사를 했다. 김포시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고 담당하는 분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말에 친구가 주선한 자리였다. 두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듣는 쪽이었지만 자리를 파할 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과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세 시반에 출근해서 장비를 메고 문수산에 올라 해 뜨는 걸 찍고, 사무실에서 장비 충전을 하고 점심 후에 다시 촬영을 하러 나가서 여덟 시는 돼야 퇴근하는 일상이란다. 그런데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너무 재미있다는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을 돌아봤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일이 없으면 그냥 집에서 책이나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책만 읽는 건 아니고 술을 마십니다, 라고 할 걸 그랬나…

지난 추석에 찍은 가족사진을 뽑는다. 며칠 전, 누나 가게에서 찍은 사진과 친구 얼굴을 찍은 사진도 뽑는다. 하룻밤 방바닥에 재운 사진을 내일이면 액자에 담아야지. 하루에 한 장이라도 사진을 찍어야지. 늘 하는 부질없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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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나는, 내가 소위 말하는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쯤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해서 총장실을 점거하고 며칠을 버틴 적이 있지만 그 시위는 ‘학원자주화’의 한자락이었다. 농담처럼, 우리 여기서 시위할 거니까 경찰서에 전화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던 시절이었다. 최루탄은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별다른 시위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졸업을 하고, 복수전공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큰 시위에 참석한 기억은 없다. 사회인(이라는 표현이 맞다면)이 되어서 오히려 굵직한 집회가 많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늘었다.

대학합격자 발표가 있고, 입학하기 전 오티라는 걸 갔다. 첫날은 학교차원에서 행사가 있었고 그날 저녁부터 과에서 모든 일정을 진행했다. 조를 나누고, 조장을 뽑고, 각 조마다 2,3학년 선배들이 몇 명씩 자리를 했다. 술잔이 돌기 시작했고, 모두들 취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무지막지한 술 강요는 없었고, 선배노릇하려고 폼을 잡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선배들은 존댓말을 하기도 했고, 신입생들을 조심스레 대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이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친해졌고, 각 조별로 장기자랑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노래들을 배웠다.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그 시절이 전대협체제에서 한총련체제로 넘어가던 때라 ‘전대협진군가’와 ‘한총련진군가’를 같이 배웠지만 내 입엔 ‘한총련진군가’는 영 어색했다. 지금도 순간순간 흥얼거린다.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3월, 입학식을 치루고 교내 행사에 참여하면 늘 민중의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어쩌다 집회에 나가면 아직 덜 여문 팔을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십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은 아니었다. NL선배들과도 PD선배들과도 친했고, 때론 NL계열 학생회를 들락거리기도 했고 PD계열 학생회 역시 들락거렸다. 글쎄, 누군가는 내게 회색분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 정신을 차리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보다 앞에 서서, 나보다 치열하게 ‘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존경했고 미안해했다.

졸업을 했다. 나는 여전히 내 앞에서, 내 대신 구호를 외치고, 내 대신 물대포를 맞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산다. 그리고 뒤에서라도 조용히 마음을 보태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대학시절 나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전해듣는다. 대기업 임원이 된 사람, 사업을 하는 사람, 유명강사가 된 사람, 여전히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투사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자본주의 첨병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세상을 바꿔보자고 밤을 새우던 사람들이 부동산과 골프회원권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것 같던 사람들이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고 기러기가족이 된 현실이, 혈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던 사람들이 정체가 불분명한 사업을 한다고 연락을 해대는 현실이.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투쟁의 선봉에선 온몸을 던져 돌파하고, 생활의 터전에선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는 것을. 오히려 늘 뒤에서 머뭇거리는, 숨어서 눈물만 흘리는 나보다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벌써 어제가 되어버린 5월 18일. 운전을 하는 내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었다. 그리고 조용히 따라불렀다. 내 작은 목소리라도 누군가에겐 의지가 되길 기도하면서.

날짜가 바뀌고서야 겨우 적는 일기다.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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