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from STORY 2010/02/28 15:19

소실점, originally uploaded by do you remember me?.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선과 선이 만나는 그곳에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다가서는만큼 그녀도 멀어졌다. 정확히 내가 움직이는 만큼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곳, 거기에 있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어느덧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이제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한손을 뻗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고 그녀는 내가 움직이는 만큼 뒷걸음질을 치고있다.

나는, 언제쯤이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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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8 15:19 2010/02/28 15:19

부러진 연필

from STORY 2007/11/26 19:09

사용자 삽입 이미지

투툭, 하고 연필이 부러졌다. 내친 김에 부러진 연필을 모아쥐고 한 번 더 부러트렸다. 손에 쥐고 쓸 때는 단단하게 느껴졌던 연필이 어느새 세조각으로 부러졌다.

"무슨 일 있어?"

옆자리 선배가 부러진 연필을 내던지는 그에게 물었다.

"마음 속의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뭔가 마구 부숴버리고 깨트리면 좀 나아질까요?"

"그럴 땐 참선을 한 번 해봐."

누군가 큭, 하고 웃었다. 참선이라니.

"그게 어려워 보여도 효과가 있다니까. 처음엔 5분은 커녕 1분도 어려울 거야. 가장 편한 자세로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거야. 그게 핵심이야.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에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는 거지. 그리고 나서 단 한가지 생각만 하는 거야. 단 한가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임 나씽, 아임 나씽."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작은 목소리를 읊어본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에겐 무념무상의 참선보다 부러트릴 연필이, 깨트릴 무언가가, 부숴버릴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

겨울의 거리는 춥고 스산했다. 코트를 입지 않은 그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건널목을 건넜다. 건널목 중간쯤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턱, 하고 맞은편에서 길을 건너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와 부딪혔다. 찡그린 얼굴을 하고 그를 외면하는 그 여자의 등 뒤로 커다란 경적소리가 울렸다.

그가 정말 두려웠던 건, 그래서 차마 무념무상의 참선을 할 수 없었던 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다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까봐서였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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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19:09 2007/11/26 19:09
"사랑에 빠졌군요?"
"네?"
"사랑에 빠졌다구요."

겨울, 여름이 끝날 것 같지 않던 날들이 지나고 찾아온 계절이었다. 거리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른 잎을 떨쳐내지 못하고 말라가고 있었다. 한 낮엔 등줄기로 땀이 흘렀지만 아침저녁으론 하얀 입김이 공기중에 떠다니는 날들이었다.

"내 눈을 봐요."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원래 누군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고 감정을 숨기는 일에는 애초부터 소질이 없었다.

"좀 전에 내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 당신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났는지 알아요?"
"내가 그랬나요?"
"그럼요. 보고 있는 나까지 기분이 밝아졌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때론 본인의 감정을 타인이 더 잘 아는 법이죠. 지금이 그렇다구요."

사랑, 조그맣게 소리내본다. 어느새 내 곁에 왔구나. 영영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을 줄 알았었는데 너 거기서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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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1 01:16 2006/11/21 01:16
“아가씨들은 잘 있어요?”
“아가씨들이라뇨?”
“눈이 예쁜 두 아가씨 말예요.”
“아…….”

가을, 초가을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한낮이라 햇살이 따가웠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게선 선선한 가을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럼요, 잘 있어요. 요즘 같이 놀아주지 못해서 그게 좀 미안하죠.”
“말은 그렇게 해도 잘 해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무심한 듯 하지만 내내 마음 쓰고 있는 거, 예전부터 그랬잖아요.”

그랬던가. 무심한 듯,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선 미안한 마음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가.

“화초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우고, 이제 사람을 만나도 되겠네요.”
“…….”

가끔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손등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을이 와도 바쁘게 걷고 있었다. 아이스라테 잔에는 아까부터 이슬이 맺혀있었다.
화초는 죽어버렸어요. 고양이들에게도 잘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요.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늦은 밤, 방에 들어서면 그저 조용히 끌어안고 한동안 앉아있는 게 전부에요. 자려고 누워있으면 귓가에 와서 작게 갸르릉거리는 녀석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잘하는 걸까요?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했죠? 잊어버린 게 아닐지도 몰라요.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글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했죠? 쓰지 않았을 뿐이겠죠.”
“…….”

잘하고 싶었어요. 온 방안에 넝쿨이 가득하도록 화초들을 키우고 싶었어요. 푸른 온실 같은 방 안에서 고양이들이 조용히 산책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방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여전히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요. 말라 죽어버린 화초 따위는 잊어버려요. 고양이들은 잘 있잖아요. 잘 하고 있어요. 넝쿨이 가득한 온실 같은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갸르릉거리는 고양이들이 있고, 창고 같은 방이지만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가 있잖아요.”

가을, 초가을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한낮의 거리, 차가운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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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01:24 2006/09/20 01:24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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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5 17:17 2006/05/25 17:17
"집 앞에 목련꽃은 피었나요?"
커피잔에 고정된 시선을 들지 않고 그가 물었다.
"예. 아마 피었겠죠."
아마 집 앞에 있는 목련나무에서는 지금도 죽은 꽃잎들이 떨어지고 있겠지.
"그럼 이제 그 노래가 기억났나요?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흥얼거렸던."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아침이, 안개에 젖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의 손길이, 그와 함께 흥얼거렸던 노래가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모든 것들이 안개 속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영영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그의 커피잔에서 옅은 안개 냄새가 났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그 아침은, 내가 어루만지던 당신의 젖은 머리카락은, 함께 흥얼거렸던 콧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요. 아니, 당신과 나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을 산 적이 없는지도 모르죠. 당신은 늘 거기에 있었고 나는 항상 여기에서 당신을 바라보기만 했으니까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창 밖엔 벚꽃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 그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영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집 앞, 마당에 있는 목련나무엔 흰 꽃들이 피어있을까? 이 밤에 흰 꽃잎들은 검게 죽어 바람에 쓸쓸히 떨어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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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7 00:53 2006/04/17 00:53

그녀

from STORY 2006/04/01 01:43
창밖으로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 수첩과 펜부터 찾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그녀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해요?"
"응? 깼어? 그냥, 꿈을 꿨는데 재미있어서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려고."
눈을 뜨지도 않고 그녀는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첩을 찾으러 일어섰더니 알몸이었다. 돌아보니 그녀 역시 알몸이다. 그제야 눈을 뜬 그녀가 볼을 붉히면서 이불로 흰 어깨를 덮는다.
"어떤 꿈이었는데요?"
"들어볼래?"
"응."
"그러니까 이런 건데. 막상 생각해보니까 그저 그런 이야기네. 내가 어느 한적한 길을 걷고 있는 거야. 밤이고, 길은 비포장 도로였어. 어둠 속을 한참을 걷는데 뒤에서 차가 한 대 오는 거야. 그래서 손을 들어서 차를 세웠지. 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아무튼, 차에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을 가다가 운전을 하는 사람 집으로 갔어."
"모르는 사람 아니었어요?"
"그렇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왜 거길 갔는지는 모르겠네. 원래 가기로 한 곳에 간 건데 그 사람이 따라온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목적지에 도착을 했는데 거기에 두 사람인가 세 사람인가가 먼저 와 있더라고. 그러면서 나한테 묻는 거야. 어디어디에서 온 게 아니냐, 오는 길에 차를 얻어 타지 않았냐, 이렇게 생긴 사람이 운전하지 않더냐, 뭐 그런 것들.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자기들도 그 차를 타고 왔다고."
그녀는 잠이 다 깬 눈치였다.
"그래서요?"
"음, 이게 전부야. 그런데 좀 이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러네."
"그게 뭐가 무서워요? 별 이야기도 아니네 뭘."
시시하다는 듯이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게, 그게 전부긴 한데, 그 사람들은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귀신이라고 해야 하나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그 사람들이 자신들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나를 태워준 사람이 그 사람들을 태우기 전에는 그 사람들도 나처럼 살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그 차를 타고 거기에 가서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무섭진 않았는데 느낌이 묘하더라고 나 역시 그 사람들하고 똑같아졌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개꿈 아니에요?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요."
"그런가, 어제 무리를 했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면서 입을 맞췄다. 하긴 무리를 하긴 했으니까.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생각을 했다. 별로 재미도 없고, 글로 써봐야 별 이야기가 될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고양이들은 다리 사이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머리맡엔 수첩도 펜도 없었고, 침대 위엔 나 혼자 누워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를 태워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와 같이 잔 그녀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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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1 01:43 2006/04/01 01:43

그 나무들이 어떤 나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살구나무였던가, 아니면 벚나무였던가. 안개가 짙게 낀 아침이었고 공기는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있었고, 당신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신의 노랫소리에 맞춰서 가끔씩 휘파람을 불었던 건 기억난다. 안개 속에서 우린 손을 잡고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걸었다.

지금에 와서 그 나무들이 무슨 나무였는지, 당신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를 기억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렇지 않은데.

마당에 서 있는 목련나무가 안개에 젖었다. 어디선가 당신의 콧노래가 들려올 것만 같은 아침, 나는 조심스레 휘파람을 분다. 우리가 손을 잡고 걷던 그 아침에 부르던 노래가 생각날 때쯤이면 목련이 피겠지. 그리고 당신의 노래를 기억할 때면 하얀 잎들은 바람에 날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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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4 03:30 2006/03/14 03:30

"세상엔 말이지, 딱 네 종류의 사람이 있어."
신촌의 거리, 술에 취한 연인들이 휘청거리는 시각, 그리고 외로움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밤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 이런 사람들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랑이 있다는 걸 철썩같이 믿어. 그리고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사랑, 그게 무슨 개소리냐면서 코웃음을 치지."
차가운 맥주가 생각났다. 그렇지만 낮부터 마신 소주에 취한 몸은 벌써부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있다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사랑의 존재를 확신하진 못하지만 어딘가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 따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지. 누가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인지는 알겠지?"

"입닥치고 술이나 마시자고. 사랑은 무슨 개뿔의 사랑."

신촌의 거리,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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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3 00:50 2005/11/03 00:50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걸었더니 몸이 쑤셨다. 차가워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벌써 예식이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교회 주변엔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 서넛이 킬킬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본당의 문을 열었다. 신랑신부가 제단 앞에 서 있었고 주례를 보는 목사님이 하객들에게 묻고 있는 참이었다.
"신성하고 거룩한 혼인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이 예식에 불만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부의 어깨가 조금 움직였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예배당 뒷쪽에 앉은 사람들은 앞에서 하는 말 따위엔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그럼, 아무런 이의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이야기하지 못한 게 있다면 그건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새로 출발하는 이 부부에게는 축복의 메시지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내게도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겨버렸다. 그녀, 오늘의 신부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맨 뒷줄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지금 잘못된 공간에, 잘못된 시간에 와 있다. 나는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예배당의 뒤에 앉아 있어야 할 게 아니라 검은 턱시도를 입고 흰 장갑을 끼고 저 앞에 있는 제단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이 기억났다. 이제는 잊었다고 믿었던 그녀의 얼굴, 작고 가녀린 손, 그리고 눈 밑에 있던 작은 점까지.
"...... 사랑이 어찌 변하겠냐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감정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변합니다. ......"
사람들이 듣건 말건 목사님은 주례사를 하고 있었다.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곤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녀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영원히 사랑할 거라던 그녀는 지금 면사포를 쓰고 저 앞에 서있고, 그녀의 말을 믿었던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있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곧 겨울이 시작되겠지.
"...... 그렇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습은 바뀌겠지만 ......"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이제는 알고 있다. 나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나의 사랑은, 그리고 그녀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 두 분의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신랑신부가 고개를 숙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순간 조용해졌다.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고 있었다. 나도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루한 예배가 끝나고 그녀가 돌아섰다. 나와 함께 있을 때엔 볼 수 없었던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녀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등을 돌리고 예배당을 나섰다. 등 뒤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이른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나는, 작은 교회 앞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가 나를 떠나던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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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0 01:07 2005/10/30 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