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출처는 알라딘
단 5분이라도 눈을 감고 생활해 본 적이 있었던가? 5분은커녕 1분도 버티기 힘들다. 실제로 지금 당장 눈을 감고서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옆자리로 옮겨 앉으려고 시도를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날 때부터 그랬던 사람들이나 후천적인 이유로 그렇게 된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세상을 볼 수 있다. 이 때의 '볼 수 있다'라는 말은 보통의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뜻과는 조금 다르다. 어쩌면 '느낄 수 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해서 별다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사실이 너무도 다행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다행스러움은 '만약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라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들, 없어서는 안 될 것들, 생존에 필요한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운전을 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신호 대기 중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된다. 그를 불쌍히 여겨 집까지 데려다 준 사람도 얼마 후 눈이 멀게 되고,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를 진찰했던 의사도 눈이 멀게 된다. 그리고 그 병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눈이 멀게 된다. '백색 질병'은 순식간에 퍼지게 되고 이 전염병에 놀란 정부는 감염자와 보균자를 격리수용한다. 그렇지만 의사의 아내는 백색 질병에 감염되지 않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버리는 순간까지도 눈이 멀지 않는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사팔뜨기 소년…….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눈이 먼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소리이고, 그 목소리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니까.
그들이 수용된 정신병원 건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침대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보지도 못하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오로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눈이 먼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눈이 먼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지옥과도 같은 공간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살을 섞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는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눈이 먼 사람들을 보살핀다. 눈이 먼 사람들을 구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백색 질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들이 눈앞에서(비록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벌어진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수치심은 사라진다. 눈이 먼 사람들은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다시 앞을 보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신기루처럼 보인다(역시 그들은 볼 수 없겠지만).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식사가 제 때에 부족함 없이 배급되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것. 다시 앞을 보고 싶다는 희망은 도저히 실현될 수 없어 보이는 이상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었지만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야말로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다. 그녀는 눈먼 사람들의 왕국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떠맡은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도울 뿐이다. 매 순간 그녀는 차라리 자신도 눈이 멀기를, 그들과 똑같이 눈먼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에게 지워진 짐, 어쩌면 스스로 짊어진 짐은 그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눈먼 사람들을 구원할 존재처럼 보인다. 그럴 수만 있다면.
따옴표 없이 길게 이어지는 대화와 문장들, 그리고 긴 단락들이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형식이 주제 사라마구의 특징인 '담론의 연속성'이기도 하다. 이런 형식은 '독자들을 몹시 긴장시키며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눈먼 사람들의 틈에서 몰래 엿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때론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백색 질병에 감염된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쓰레기와 악취, 그리고 죽음의 도시다. 사람들은 유령처럼 거리를 떠돌고 개들은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먹을 건 없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설물을 쏟아내고 매일 아침이면 마치 다른 행성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 것처럼 거리는 쓰레기로 뒤덮인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저 앞을 볼 수 없을 뿐인데…….
백색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한다. 암에 걸려서 죽거나 에이즈에 걸려서 죽거나 다리가 부러져서 죽거나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눈이 멀고 암에 걸려서 죽거나 눈이 멀고 에이즈에 걸려서 죽거나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져서 죽는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다. 눈이 먼 순간, 죽음조차도 달라져버린다. 당연히 삶 역시 앞이 보이던 때의 삶과는 달라져버린다.
어쩌면 의사의 아내의 말처럼 백색 질병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볼 수는 있지만 보려고 하지 않는 눈먼 사람들, 지금의 우리도 눈먼 사람들일지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의사가 대꾸한 말은 우리가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하는 말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괜찮아, 하고 말한다.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것은 일반적으로 용기 있는 태도로 여겨지며, 오직 인류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아가씨의 부모님도 가엾게 되고, 아가씨도 가엾게 될 거야,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 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아가씨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적이 없는걸,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가 말했다.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